브리꼴레르(Bricoleur)의 유쾌한 꼬리잡기


김소원 

성북문화재단 성북구립미술관 학예연구사

2023

푸른지대 창작샘터 레지던시 결과보고전 <ONEPIECES> 전시도록 수록



작가를 주목하게 하는 힘

예술가란 어떤 존재인가? 어르신들, 혹은 자신이 신나게 랩을 하고 춤을 추는 영상을 떠올리게 하는 ‘유쾌한’ 현지윤은 이 근본적 질문을 환기시킨다. 이는 작가에게 작품 못지않게 창작자를 바라보도록 만드는 어떤 힘이 있다는 뜻이겠지만, ‘현재 합의된 수준의 예술과 예술계’ 테두리 밖으로 나가보도록 하는 질문과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지금껏 非미술적 소재·대상이었다 할지라도 예술가의 아이디어와 접근에 따라 예술로의 편입유무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패러다임 자체를 뒤바꿔 버린 사건은 마르셀 뒤샹이나 앤디워홀과 같은 걸출한 예술가들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본다. 사실상 꽤 오랜 동안, 아니 현재도 여전히 그러한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들이 만들어 놓은 터전에서 예술의 정의와 범주가 자동적으로 결정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자동화된 시스템을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의도적이든 결과적이든, 예술과 비예술의 아슬아슬한 경계지점에 대한 관심과 도발을 보여주는 작가에 대한 호감도는 급상승하게 된다.  


남다른 유연함일까? 끌어 오고 연결 짓고 뒤섞고 다시 연결하는 것들에 대한 현지윤의 말랑한 사고와 실행을 눈 여겨 보게 된다. 작가를 응시하게 만드는 현지윤의 존재감. 그것이 단지 그가 자신의 영상 작업에 직접 등장(출연)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가의 물리적인 등장 그 자체 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출연하고 있는지 구체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직접 보이지 않는 경우는 어떤 식으로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지, 즉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유의미하게 드러나는 작가의 존재감, 에너지, 비가시적인 영역에서 디렉터 포지셔닝 등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거는 작가를 신비화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보수적인 예술에서는 터부시 될 수 있는 경영학적 맥락에서 가져올 수 있는 이야기로서, 위험과 위기를 돌파하는 도전과 혁신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정신을 의미하는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과 관련이 있다.   


브리꼴레르(Bricoleur)로서의 면모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의 맥락에서 현지윤의 존재감을 바라보며, 그의 자원 활용력을 집중해 보게 된다. 즉, 자신이 가진 자원을 활용하여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도록 만들고, 손 안에 없는 자원도 예술적 자원으로 끌어 오는 브리꼴레르(Bricoleur)로서의 면모이다. 그것은 높은 적극성과 창발적(Emergent property) 아이디어 창출과 관련이 있다. 현재 통용되는 기술(記述)방식에 의존해 현지윤 작가를 설명하자면 그저 회화와 영상을 다루는 작가로 한줄 정리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브리꼴레르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대학 전공과 ‘외도’의 경험을 모두 활용하여 서사가 있는 회화, 시나리오의 일부가 되는 회화, 음악과 춤과 랩이 있는 영상 등을 만들거나 이전 작업의 한 요소를 다음 작업의 시작점으로 활용하여 제 3의 아이디어로 발전시킨 보다 의미 있는 해석의 대상이 된다. 


『누가 브리꼴레르인가』에서는 브리꼴레르의 요소를 설명하기 위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관한 연구를 인용하며 호기심, 실험정신, 불확실성에 대한 포용력, 예술과 과학, 논리와 상상 사이 균형 잡힌 조화, 그리고 연관성의 원칙을 소개한다. 여기서 특히 연관성의 원칙은 “모든 사물과 현상에 존재하는 연결 관계를 인식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적 사고에서 나오는 것으로,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를 연결하고 결합해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데서 비롯된다”고 설명되고 있다. 현지윤의 경우는, 비교적 관련도가 낮지 않은 대상끼리의 연결과 조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브리꼴레르로서의 관점이 다소 흐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연결 관계를 인식하고 평가하는 시스템적 사고”에서 그는,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구조’나 ‘위계적 사고 구조’에서 벗어나 그만의 브리꼴레르적 방식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탈위계적인 관계 맺기 

현지윤의 남다른 유연함과 탈위계적 사고 구조는 일관되게 이어진다. 그는 미술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자 동시에 장벽인 엘리트주의적 사고로부터 자유로워 보이는데, 이는 그를 또 다른 형태의 브리꼴레르로 해석 할 수 있도록 일조한다. 현지윤은 ‘어르신 프로젝트’를 오랜 기간 지속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노인 공경’의 프레임을 현대적이고 탈위계적인 ‘노인과의 유쾌한 동거’ 프레임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현재, 전통적인 ‘노인 공경‘보다는 ’노인과의 동거’가 보편적 공감을 얻고 있지만, 작가는 한발 더 나아가 ‘유쾌한’ 동거를 제안한다. 젊은이들에게는 기피대상이 될 수 있는 노인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는 흥을 자아내는 비트와 멜로디의 EDM과 춤, 랩을 섞은 즐거운 놀이 형식을 통해 다른 이미지로 탈바꿈 된다. 현지윤의 ‘뮤직비디오’ 작업들을 통하여, 노인과의 동거는 절로 ‘유쾌한’ 정서와 연결되며, 그들과의 ‘동거’는 즐거운 일로 느껴지는 변화가 일어난다.  


랩이나 EDM은 노인들이 해 내기엔 상당한 수준의 훈련과 재능, 전문적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장르이자 힙스터들의 전유물로 여겨지기에, 다소 난감한 측면이 존재한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노인과 이 장치(랩, EDM)를 과감하게 연결한 방식은 아주 극명하게 브리꼴레르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극단의 연결을 보다 자연스럽게 만드는 데에는 키치적인 B급 코드가 적극 활용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영리한 선택이다. 고연령층이 아니라 해도 일반인들이 단기간의 연습을 통해 거부감 없는 수준의 퀄리티를 보여주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래도 어설플 수밖에 없는 결과물의 태생적 한계를 사전에 가늠하고 장난기어린 필터를 사용한 것은 적절한 전략적 태도로 읽힌다. 그리고 이러한 브리꼴레르적 ‘연결’의 근간에는 젊은이의 문화, 즉 자신의 문화를 노인도 얼마든 익히고 즐길 수 있다는 수평적 사고와 유연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대상에 대한 애정도와 관심도는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그것은 빈도수와 지속기간이다. 노인은 현지윤 작업의 주요 소재이자 10여 년간 지속하고 있는 소재이다. 암암리에 골칫거리처럼 보도되고 있는 고령화 사회의 이미지 프레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힘이 현지윤 작가에게 내재되어 있다. 마음과 관심, 사랑과 애정, 진심과 진정성 등에서 우러나온 작업의 바이브(vibe)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가들의 작업은 생각보다 많다. 출발점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표현하는 노인은 다르다. 그들은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쓸모없는 존재도 아니겠지만, 향수나 동정, 공경의 대상도 아니다. 이 해석들에는 공통적으로 친밀감보다는 ‘거리감’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에게 노인은 지혜로우면서 귀엽고, 강하면서 부드러운 친구처럼 보인다. 모셔야할 존재도 의지할 존재도 아닌 더불어 같이 사는 벗일 뿐이다.   


꼬리물기, 꼬리잡기

이번 결과보고전에 설치 된 〈30마리 개들의 꼬리잡기 대회〉(2023)는 브리꼴레르로서의 현지윤을 매우 강력하게 상징화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꼬리잡기 대회’는 작가의 일상이자 중요한 충전 시간인 산책을 통해 얻은 영감이며, ‘산책자들의 반려견’이 영감의 원천이다. ‘산책자 이웃’, ‘반려견 이웃’은, 노인을 ‘유쾌한 동거’의 대상으로 바라본 시선과 일맥상통하며 꼬리물기 혹은 꼬리잡기처럼 작동한다.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비정형 캔버스(shaped canvas)에 작가가 상상한 30마리 개들을 배치하고 작가가 작명한 이름을 부여했다. 개가 그려진 원형 캔버스들이 평면 조각처럼 전시장 목조 스탠드 바닥 위에 적절히 배치되고 그 뒤로 카툰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 가득한 두 폭짜리 대형 화폭이 배경처럼 세워졌다. 이 작품은 그림이자 평면조각의 설치가 되며, 완결된 회화 작품이자 이후 진행 가능한 미디어 작업용 사전 스토리보드가 된다. 일차원적으로 그저 평면 회화로 보일 수 있는 이 작업들이 사실상 ‘2차원적’ 표면이나 ‘회화 장르’에 귀속되지 않는다. 각기 조금씩 다른 크기의 판에 그려진 개들은 오밀조밀 운동성을 느끼게 하는 다양한 각도로 눕혀지고 세워지며 설치되었다. 스토리보드의 기능을 겸하는 대형 카툰화의 뒷면에도 개들의 행렬은 이어진다. 이는 시간이 흐름과 공간의 확장을 끝없이 작업에 부여한 결과물이자 현지윤에게 이 요소가 매우 중요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30마리 개들의 꼬리잡기 대회〉가 평면 작품일지라도 그의 ‘뮤직비디오’들과 마찬가지로 연출 감독의 존재가 느껴지는 것은 참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저 편의상 회화와 영상이라는 껍질을 뒤집어 쓴 것처럼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마치 모든 등장인물을 무대 위에 세워놓은 듯한 정면성이 강조되어 있으며, 칸칸이 나뉘어 그려진 이미지들은 곧 벌어질 사건을 암시하듯 어떤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회화처럼 보이지만 화면 내부와 외부에 연극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회화가 조각과 스토리보드로 확장되고 다시 영상작업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은 이번 전시의 제목으로 삼은 ‘꼬리잡기’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번 신작에서 꼬리잡기는 개들의 꼬리잡기 대회로 특정되었지만, 사실 ‘꼬리잡기’ 자체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작가의 평소 생각과 아이디어 발현의 패턴이다. 유쾌하고 유연하고 탈위계적인 현지윤만의 브리꼴레르 개념이 꼬리잡기의 형태로 발화한 셈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할 수 있는지, 활용 가능한 자원이 무엇이며 무엇을 확장·발전시킬 것인지, 어떤 연결과 조합이 창발적 발상에 유효한지 등을 잘 알고 있는 유쾌한 브리꼴레르 현지윤의 다음 꼬리잡기를 미소와 함께 기대해 본다.



(1) 프랑스어에서 나온 말로 ‘bricolage’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사전적 의미는 ‘특별히 준비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도구나 재료를 사용해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사람’이다.  

 (2) 구성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상위 계층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 떠오름 현상. 

 (3) 『누가 브리꼴레르인가』, 유영만, 쌤앤파커스, 2013 

 (4) p116.



글. 김소원

김소원은 성북문화재단 성북구립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며, 서양미술사학과 석사 졸업 및 문화예술경영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다양한 주제전과 ‘성북 N 작가공모’, ‘에버레버 아트 프로젝트’와 같은 창작자 지원 프로젝트 등을 기획해 오고 있으며, 미술비평, 연구 기반의 활동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여러 문화예술계 종사자들과의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새로운 협력 프로젝트를 고안하는 등 패러다임 전환적 실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으며, 어린이와 어른에 경계를 두지 않는 시의성 있는 주제의 전시, 미술, 전통음악,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전시를 비롯, 최근에는 여성과 기술을 테마로 한 지원분야를 기획·신설하여 관련 담론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다.






회한의 진경, 희망의 풍경

 

정일주 

「퍼블릭아트」 편집장

2020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이연연상> 전시도록 수록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 현지윤이 완성한 필름을 보자니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리어왕’의 대사를 빌어 내뱉은 문장이 떠오른다. 

식물도감이나 동물도감, 인체해부학도감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도감’이란 책이 있다면 ‘신중년’ 세대를 소개하는 챕터가 있을 테고, 그 한편을 독립적으로 담는다는 상상으로 작가는 ‘신중년도감’이란 타이틀을 정했다. 2020년 한 해에 걸쳐 기획하고 기록하고 각색한 작품은 ‘신중년’을 주목하는 이유와 소개로 시작해 중심 인터뷰이들의 과거, 현재, 앞으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대목대목 담담한 술회형식으로 삽입되어 있다. 그리고 그 끝에 신중년 세대에게 젊은 세대가 보내는 응원이 루프스테이션 음악으로 구성된 뮤직비디오로 덧붙는다. 실제 인터뷰 중에 녹음된 중년의 소망과 바람이 담긴 내용이나 인상적인 한 문장이나 또는 단어가 가사가 되고, 그들이 직접 만들어 낸 일상의 소리들이 악기로 구성된 루프스테이션 음악이 된 것이다. 이 음악과 함께 퍼포먼스들이 어우러져 보이는 영상 그리고 작가가 수집한 푸티지를 적용한 모션그래픽도 가세됐다. 

대부분의 영상 작업은 내가 있지 않은, 있을 수 없는 장소를 보란 듯이 눈앞에 펼쳐놓거나 언젠가 내가 볼 수 있을지도, 될 수 있을지도 모를 무정형의 환상을 눈앞에 구체화시켜 준다. 그렇기에 필름과 사진은 의도적으로 현실을 초월한다. 지금의 내가 아닌 나로 살고 싶은 욕망, 내가 가졌을지도 모를 수백, 수천 개의 가능성을 작품으로라도 타진해보고 싶은 관객의 마음을 건들기 위해 말이다. 인간의 욕망은 대부분 타자의 욕망이라 했던가. 누군가에 의해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진 무수한 욕망의 대상들을 한껏 충족시켜 보고 마침내 그 세계에 작가와 관객이 함께 이입되어지는 것을 전제로, 연출되거나 조작된 이미지가 판을 칠 것이라는 것을 잊고 몰입하도록 연막을 친다. 특정한 작품을 대할 때 1차적 인식은 “실재를 찍었으리라”는 불신의 유예를 기반으로 한다. 질문해보자. 눈앞에 있는 평상복 차림의 의사보다는, 의사 가운을 걸친 드라마 속의 탤런트가 더욱 의사다워 보이지 않나? 현지윤은 환상과 실제를 구분 짓고 싶기도, 그 구분을 없애고 싶기도 한 이상심리를 잘 비집고 들어간다.

작가는 중년을, 누구나 겪는 ‘상실’을 다른 세대보다 높은 빈도로 다양하게 겪고 있는 세대로 상정했다. 정년퇴직으로 인한 사회적 지위의 상실, 노화와 건강상의 문제로 겪는 신체적 상실, 결혼 이후 경력 단절로 인한 상실, 실질적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기한 것에 대한 상실감과 아쉬움, 본인의 삶을 희생하고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역할에 머문 것에 대한, 자녀가 독립하면서 생긴 상실감과 외로움, 부모나 친구 등의 소중한 사람과의 사별로 인한 상실을 다 껴안은 층위로 본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상실에 대한 상처를 가지고 있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고민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해결 방안을 찾아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이전의 중년과는 달리 현재의 중년은 고령화 시대가 되고, 수명이 길어지면서 본인의 삶의 정체성을 찾고 주체적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삶이 길어지면서 앞으로의 삶을 고민하고 방황하는 중년, 적극적으로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중년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을 작가는 화면 안에 담으려 애썼다. 

어긋나듯 불완전한 듯, 볼만한 듯 어색한 듯, 묘한 연출로 2018년 메이킹필름 <어서와 어르신은 처음이지?>를 선보인 작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화두인 다중적 주제를 영민하게 건드리며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지만, 실제로는 일상적이지 않은 장면으로 어떤 이에겐 이미지들이 추출된 구체적 영화가 존재하는 것 같은 기시감을 선사했다. 직접적인 차용대신 1950-60년대의 헐리웃 필름이나 느와르 필름, 유러피안 아트 하우스 필름 등의 전형적인 이미지로부터 영감을 받은 비비드한 색감으로 주인공들의 전형성을 잘 축출한 필름은 2019년 충무로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과 서울무용영화제 BEST 10 등을 수상하며 사람들로부터 작품을 거론하고 작가 이름 앞에 감독이란 수식이 당당하게 붙게 하는 성과를 이룩해 냈다. 

이 작품 이전엔 2017년 만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가 있다. 수원 행궁동에 사는 스무 명의 노인들에게 삶과 늙음 그리고 죽음에 대해 묻고 담은 이 인터뷰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작가는 행궁동 일대에 영상과 사진을 전시하고 출판물과 디자인 상품을 제작했다. ‘선두주자’라는 글귀가 쓰인 캡 모자를 쓰고 망치를 내리치는 대장간 주인의 클로즈업된 얼굴에 핫핑크색 텍스트가 박힌 포스터엔 각본부터 촬영, 편집과 디자인까지 가내수공업을 불사한 작가의 열의가 고스란히 박제돼 있다. 그가 노인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하다.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자신의 미래와 마주하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그 세대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과 고민을 탐구하는 작가가 이번엔 중년을 바라봤다. 중년세대가 겪은 과거의 시대적 배경과 사회의 분위기로 인한 개인의 선택,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 중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현재에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 살피고 싶었음이다. ‘신중년도감’의 ‘신중년’은 말 그대로 기존의 중년과는 다르다. ‘자기 자신을 가꾸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며 젊게 생활하는 중년’을 이르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건강하고 젊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주체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는 6명의 주인공이 인터뷰 대상으로 선택됐다. 

기성세대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방식을 통해 작가가 말하는 궁극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젊은 세대가 겪지 않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고민 사이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선배들의 줄거리를 톺는 것이다. 중년세대들도 현재의 나이로 처음 살아보는 것이기에 고민스럽고, 서툰 부분들이 있다. 저마다 상처와 상실을 겪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아가고 있는 모습에 보내는 응원이 작가의 진심인 것이다. “언젠간 중년이 될 젊은 세대는 나이 듦을 생각해보면서 삶을 반추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기성세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지점이 생겼으면 좋겠다. 나의 엄마, 이모, 아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다가오길 바란다. 중년 관객에겐 공감과 위로를 선사하고 싶다”고 작가는 이 작품의 의미를 밝힌다. 

2012년 뉴욕 모마에 신디 셔먼 대형 회고전이 열렸다. 그중 단연 눈에 띈 것은 2008년 이후 제작된 대형 작품이었다. 대부분 2미터가 넘는 큰 규모의 작품들에서 사교계 모임 속 여성으로 분한 셔먼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1954년생인 셔먼 자신에 대한 성찰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노상 카메라 앞에서 모델로 분하면서 자신의 육체적 변화를 누구보다 알알하게 시각적으로 감지했던 그녀 아닌가. 사진 속 과장된 ‘주름’은 일부는 연출일 테지만, 일부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나이테였는데 그가 완성한 화면들은 젊음과 외모에 집착을 보이는 살아있는 영혼들에게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만약 아름답게 느끼게 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나이의 숭고한 의미를 깊이 있게 음미하도록 했다. 환상과 허구이되, 실제보다 리얼한 셔먼의 이러한 연출이 현지윤에게도 나름의 툴이 돼 가동된다면 한층 더 밀도 높은 미술이 되리라 넌지시 기대를 얹는다. 






행궁동 보헤미안 랩소디


한문희 

문화기획자, 프로젝트 머리에 꽃  

2018

수원시립미술관 <안녕하신가영> 전시도록 수록



노인정 가기 싫은 막내들의 ‘그루브’<어서와 어르신은 처음이지?>

<어르신 SWAG>, <어르신 블루스>, <어랍쇼> 세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았다. 유쾌하고 재미있어 미소와 웃음이 절로 나오는, 어느 대목에선 가슴 찡하고 감동적이어서 보고 나면 흐뭇해지는 어르신들의 뮤직비디오. “와썹 내 나이 세븐티 노인정에선 내가 제일 핫한 어린이(Yo)” “양쪽 귀엔 보청기 내 앞에 놓인 보행기, 튼튼한 임플란트 어금니(딱딱) 늙었다 놀리기 없기” “누가 뭐래도 내 맘대로 어르신 SWAG” “칠십 인생무상 주름마다 기록된 삶의 훈장(Hoo) <어르신 SWAG 가사 중> “여보시오 거기 할매 잠깐 내 말 좀 들어보소. 내가 이날 이 나이 먹고 너무 외로워서 그런다오” “여보시오 거기 양반 내가 아주 말도 못하요. 지금도 생각만 하면은 가슴팍이 터질라고 허요” “백 세 인생이라 하지만 이렇게 살면 뭐 하나, 죽을 때까지 남은 인생 외롭진 말아야지” <어르신 블루스> 가사 중

“온 동네 할매 할배 여기 모여 봐봐. 음악에 맞춰서 몸을 흔들어 Bounce Bounce. 괴로운 일도 외롭고 힘든 날도 다 잊고 우리 모두 손을 높이 들어 Wow Wow.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었지 이 꼴 저 꼴 산전수전 다 겪었어. 사랑도 이별도 다 지나고 보니 세월이 무상하더라” “내가 먼저 손 내밀면 인생 별거 없잖아. 욕심 버리고 베풀면서 남은 인생 제대로 즐기자” <어랍쇼> 가사 중.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내 맘대로 즐기고, 인간적인 외로움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며 치열하게 살아왔으니 남은 인생은 욕심 버리고 남에게 베풀면서 즐겁게 살자고 노래하는 어르신들 앞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저 응원하고 지지할 테니 건강하고 멋지게 살아주세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이 듦에 대하여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25세를 전후로 성장이 멈춘다고 한다. 다시 말해 태어나서 스물다섯 해 동안은 활발히 세포분열을 하며 신체 부위들이 커지고 더욱 튼튼해지지만 그 이후로는 성장을 멈추고 잠시 최고의 절정기를 누리다 서서히 노화가 시작된다. 그 시기가 대략 30세쯤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닌가. 인생의 최고 절정기인 30대에 이미 늙어가고 있다니. 대게 누구나 그렇듯, 나도 20대 초반을 불확실한 미래로 불안해하고 수많은 선택지에 갈등하며, 답도 없는 질문에 고민하고 좌충우돌했다. 그러면서 막연하게 빨리 서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른이 되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결되고 완숙해지며 흔들림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서른은 그렇게 오지 않았다. 서른에 들어선 후에도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고민하고 절망했다. 사십 중반에 접어든 지금 나는 여전히 미숙하지만 그때보다는 여유 있게 인생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음미할 줄도 알게 된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른은 완성되는 나이가 아니라 시작하는 나이구나. 그때까지는 몸과 마음이 성장하고 지식을 쌓아 인생을 살아갈 준비를 한 시기였고 서른이 되면서 모든 준비가 끝나 인생의 참 의미들을 발견해 가는 시간이구나. 어른이 된 이후부터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몸의 기능이 퇴화되는 생물학적 노화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진정한 어른으로, 한 사람의 온전한 인간으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인생의 꽃은 어쩌면 20대가 아니라 인생의 완숙미가 더해지는 중년기와 그 이후의 노년기 일지 모르겠다. 너무 작위적이고 자기 위안적인 해석인가. 그러면 또 어떤가, 어차피 인생이란 자기 의미 부여 나름이다. 시인 사무엘 올만은 ‘청춘’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장밋빛 볼,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의 문제가 아니라, 늠름한 의지, 빼어난 상상력, 불타는 정열을 가리킨다. 청춘은 삶의 깊은 데서 솟아나는 샘물의 신선함이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 7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려가지만 열정을 잃으면 마음이 시든다. 고뇌, 공포, 실망에 의하여 기력은 땅을 기고 정신은 먼지가 된다. 영감이 사라진 채, 그대의 영혼이 냉소의 눈과 염세의 얼음으로 뒤덮이게 되면, 20세라도 인간은 늙는다.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다면 80세라 할지라도 그대는 청춘을 유지한 채 늙을 수 있으리라. 사무엘 울만<청춘>_중간소절 일부 생략. 청춘을 인생의 어떠한 특정 기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청춘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발견해야 할 의미라 생각한다.



열심히 살아가는 자들의 유희

우리 부모 세대들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성실한 자세로 열심히 살아오셨다. 어쩌면 살았다는 표현보다 오히려 견뎌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어떤 세대고 간에 그 시대의 어려움이 없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부모 세대는 너무도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경제적 어려움과 풍요를 그리고 비교적 정서적으로 위안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의 구조에서 거의 모든 것이 사라진 정신적 궁핍의 시대까지. 많은 변화를 겪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빠른 시대의 변화와 흐름을 안타깝게도 우리는 막아설 수 없다. 다만 그 물살에 휩쓸리지는 말자. 시대야 어찌 되었든 내 인생 내 멋대로 즐겁게 살아가자. 여기 이 시대의 ‘어르신’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지만, 자신의 일과 인생에 자부심을 느끼며 인생의 ‘유희’하고자 하는 분들. 행궁동 보헤미안의 인생 랩소디를 들어보시라.



작가에게 던져진 화두와 유쾌한 마법 

살아가면서 누구나 이별을 하게 된다. 그 이별은 죽음 일 수도 있고 거리의 멀어짐 일 수도 있다. 다른 장소에 머문다 해도 같은 시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만날 수 있다. 특히 요즘처럼 소통 수단이 발달한 사회에서 장소 상의 이별은 별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죽음은 다르다. 시간도 장소도 우리는 더 이상 공유할 수 없다. 시간과 장소에 대한 그 사람과의 기억만이 함께 할 뿐이다. 그래서 그로 인한 상실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작가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오랜 시간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무력감과 불확실함에서 오는 불안함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슬퍼하고, 애도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며 기록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가 생겨났다.” 죽음에 몰두하니 삶에 대한 의지가 더욱 커진 셈이다. 어르신들의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죽음’을 무섭거나 두렵게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의 당연한 한 조각으로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남은 인생 베풀면서 즐겁게 살고 싶어 하신다. 이 또한 노년에 접어들면서 받아들인 ‘삶의 의지’가 아닐까. 전시된 영상을 보면서 작가가 궁금했다. 어떻게 저 많은 어르신들을 카메라 앞에 세우고, 노래하고 춤추게 했을까. 어르신들은 보통의 경우, 웬만한 관계가 아니고서는 사진이나 영상 촬영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한 동네에서 보아온 익숙한 청년도 아닌 카메라를 들고 접근하는 낯선 젊은이에게 어르신들은 어떻게 마음을 여셨을까. 작가의 진심과 정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작가는 가족을 대하듯 정성을 다해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귀여운 손녀처럼. 그들을 작업의 대상이 아닌 인생의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자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대하듯 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직접 작가를 직접 만나보고 확인되었다. “아 저 유쾌함과 친근함이 어르신들의 마음을 열었구나” 인생의 묵직함과 그것을 지탱해 주는 유쾌함을 보여주신 어르신들과 그것을 세상에 내어 놓아준 작가에게 감사한다. 어르신들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작가도 본인의 인생철학과 ‘멋’대로 멋진 작업을 이어가길 응원한다. 


 




진심과 공감으로 비춰진 세상


김유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2017

수원문화재단 <인인화락 2017 겨울호> 수록글 62p-67p



사라질 것들에 대한 두려움

 현지윤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은 2015년 ‘평상’이라는 행궁동 청년문화예술 네트워크를 통해서였다. 수원에 기반을 둔 청년들이 만든 문화예술 네트워크 평상은 지역주민들과 함께 소통했던 공간으로, 행궁동 작업실에서 코뿔소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던 현지윤 작가를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당시 현지윤 작가는 자신과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사부인>이라는 영상 작품을 소개했다. 작품을 보기 전까지 젊은 작가가 할머니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제작했다는 것은 몹시 의아했고, 꽤 흥미로웠다. 노인들에 대한 현지윤 작가의 관심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작가의 관심에 깊게 각인된 할머니들의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할머니와 홀로 된 외동딸을 걱정하는 외할머니의 기묘한 동거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부인>은 2014년 제작된 약 9분 14초 분량의 다큐멘터리 영상 작품이다. 회화 작업을 주로 했던 작가가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모습을 각각 캔버스에 담고, 이 작품을 전시하여 할머니들에게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을 담은 영상은 그 어떤 기교나 화려함 없이 그 자체의 이야기만으로 따뜻함이 느껴졌다. <사부인>은 결혼이라는 제도로 연결된 관계이지만 어쩌면 남남에 가까운 사부인들 간의 교류, 동거를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이라는 부분이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사부인>은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각자 다른 위치에서 상실을 겪은 당사자들인 할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손녀가 서로의 빈자리를 조용히 채워주고 있는 이 작품은 담담하고 밝은 영상이었지만 그로 인해 그 이면의 상실에 대한 감정이 더 애잔하게 전달되는 작품이었다. 작가는 영상 속에서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해 그 시점으로부터 6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부재감을 토로한다. 갑작스러운 상실로 인한 상처는 6년이 지났음에도 아물지 못했고, 또 다시 겪을지도 모를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만들었다. 이처럼 상실에 대한 개인적인 아픔에서 비롯된 곧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은 더 나아가 할머니들을 작품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목적을 갖게 했다. 실제로 작가는 <사부인>을 연출할 즈음 할머니들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의 장면이 반복적으로 연상되었고 어떤 필연적 이유로 영상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할머니들의 모습을 영상에 담아내야 한다는 혹은 기록해야 한다는 어떤 절실함이 있었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사부인>을 제작하게 되었고, 현지윤 작가가 영상이라는 작업을 통해 상실과 사라짐에 대해 기록하는 첫 시작이 되었다. 기억하기 위한 기록, 이것은 상실에 대한 저항으로서 언젠가 반드시 사라질 대상에 대한 애도의 차원으로 연결된다.



애도의 다른 방식

애도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 대상, 즉 죽음에 대한 슬픔의 감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라진 분명한 대상이 존재한다. 그러나 애도는 상실한 모든 대상, 그리고 상실할 수도 있는 대상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애도는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며, 애도의 감정은 상실한 대상을 기억하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 분출되기도 한다. 상실의 고통은 모든 대상을 곧 사라질 것으로 여기고, 이에 저항하며 기억하기 위한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1915~1980)가 그의 어머니를 잃은 직후부터 써 내려간 『애도일기』(1)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1978. 4. 12일 경


기록을 하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다. {이렇게} 기록을 하는 건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다. 아무것도 자기를 이겨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그 고통을. 돌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없는 그런 것.

“기념비”의 필요성.(2)


그가 말하는 ‘기념비’라는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한 기록이다. 그는 망각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애도일기』를 써 내려갔고, 이 과정을 통해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 이후 겪는 다양한 감정들을 세심하게 표현하며 상실의 고통을 치유해 나간다. 또한 이러한 애도 기간 중에도 자신의 주요 저서들을 완성하며, 애도의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갔다. 현지윤 작가는 개인적 상실로 인한 애도의 감정을 영상을 통한 기록으로 표현했다. 이 역시 망각의 고통을 이기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으로 갑작스러운 상실과 그에 대한 감정을 담은 <사부인>은 현지윤 작가의 ‘기념비’이며 ‘애도일기’일 것이다. 


2014년 <사부인>을 제작했던 당시에만 해도 사적인 애도 차원에 머물렀던 노인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점차 그 범위를 넓혀간다. 외할머니의 병환을 겪으며 고령화 사회에서 노인 복지의 문제,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무게 등을 체감한 작가는 동시대 사회에서 노인의 현실적 삶에 관심을 갖게 된다. 사적인 애도와 기억의 방식에서 나타난 노인들에 대한 관심이 점점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회화를 주 표현 매체로 사용했던 작가가 영상이라는 표현 방식을 사용한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우연적으로 접했던 영상 제작 수업을 통해 그림이라는 단편적 장면으로는 전달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영상과 함께 하면 더 큰 공감의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어떤 특정한 일이나 사건을 깊이 이해하며 마치 내 이야기인 것 같다 느끼는 ‘공감’의 경험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본 관람객들의 반응을 통해 깨닫게 된다. <사부인>이라는 자신의 개인적 영상이 관람객들에게 미친 영향에 스스로 놀랐다고 말하는 작가는 영상에 더 깊이 탐닉하며 영상이 가진 힘을 공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작가의 개인적 이야기들과 상실에 대한 애도가 관객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험은 현지윤 작가의 작업 영역과 방식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가족으로서 할머니들로부터 비롯된 사적인 애도를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애도의 감정을 다르게 풀어나간 작가의 방식일 것이다.



소통의 대상으로서 노인

다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전시로 돌아가 본다. 현지윤 작가는 전시에 출품된 작품을 위해 행궁동 인근에 거주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전에 선택한 만남도 있었고,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진 만남도 있었다. 사실 행궁길 갤러리에 소개된 사진 작품들은 영상, 기록물 등으로 이루어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라는 전체 프로젝트의 일부이다. 약 6개월 동안 이루어진 이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20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 대화하며, 노년의 삶,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 과정의 결과물을 영상과 사진, 책이라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기록하였다.

영상, 회화 등 현지윤 작가의 작업 방식은 다양하지만 이 전시에서 중요하게 생각된 것은 전체 과정을 디렉팅하고, 노인들과의 소통 과정 전 지점을 작가가 직접 기획하고 진행했다는 것이다. 사진 혹은 영상이라는 완결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것을 완성하기 위한 소통의 과정이 전체 프로젝트의 핵심인 것이다. 또한 프로젝트를 통해 파생된 기록들은 계속해서 또 다른 소통을 만들어나가는 계기가 된다.(3)

전시된 사진 작품들 중 행궁동 문구점 할아버지를 촬영한 사진이 눈에 띄었다. 불조심이라는 푯말 앞에서 웃고 계신 할아버지는 얼마 전 근방에서 발생한 큰 화재사건의 당사자였다. 사진을 촬영한 것은 그 이전이었지만 공교롭게도 불조심이라는 문구가 우연히 사진 속에 담긴 것이다. 이러한 우연적 요소도 놀라웠지만 그 직후 걱정스러운 마음에 할아버지를 다시 찾아가 안부를 챙겼던 작가의 따뜻함이 더 인상적이었다. 현지윤 작가가 어떤 장르적 차원에서 커뮤니티 아트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뿐인 소통, 커뮤니티 아트라는 허울 속에서 젊은 작가의 진솔함이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노인이라 불리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법적인 나이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현지윤 작가와의 대화 중에 노인이라는 것은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기뻐하는 나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만큼 노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 어린 관심과 공감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일 것이다. 노인들은 소통의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것을 발견한 현지윤 작가는 다름 아닌 소통과 공감의 과정 속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1) 쪽지 형식으로 써나간 일기들은 롤랑 바르트 사후 한 권의 책으로 편집되었고, 국내에도 번역서가 출판되었다. 

롤랑 바르트, 김진영 옮김, 『애도일기』, 이순, 2012

(2) 위의 책, p. 123

(3) 작가는 페이스북, 웹매거진 브런치 등에 프로젝트의 결과로 제작된 영상을 공개하여 공유 하고 있다.